대전시 중구 뿌리공원로 79에 위치한 ‘성씨(姓氏)별 뿌리공원’은 민과 관이 유기적인 협조체제로 조성된 전국 유일의 “효” 테마공원으로써 자신의 뿌리를 되찾을 수 있는 성시별 조형물과 사신도 및 12지지를 형성화한 부리 깊은 샘물, 각종행사를 할 수 있는 수변무대, 잔디광장과 공원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 팔각정자 뿐만 아니라 산림욕장, 자연관찰원 등 다양한 시설이 갖추어진 체험학습의 산 교육장이다.
공주공산 이씨(번호 87)
작품명 : 繁榮(번영), 조각가 : 안의종
작품설명 : 유래에서 보듯이 시조부터 文武(문무)를 겸비하여 어떠한 어려움이나 소요를 평온하게 진정시키는 능력있는 힘찬 모습이었으므로, 왼쪽은 文(문)의 상징인 책모양이며 충·효·예의 기상을 세 줄로 표현하고, 오른쪽은 武(무)의 상징인 무기로 화살모양을 단순화 하였고, 앞부분의 사각은 방패를 표현하여 조화를 이루는 두 기둥은 강력한 문무의 기상이며 밑 부분과 유래비문 원판은 안정과 화합의 근원으로 조형의 미를 갖추어 평화와 안녕을 이루는 繁榮(번영)의 모습이다.
유래 ▸ 公州(公山)이씨 시조 휘 천일(天一)은 신라조 박혁거세왕 5년에 18세 때 아우 홍일(弘一)과 문장으로 선택되어 중국에 들어가 중사마시에 장원급제하여 공주(公主)와 혼인하였다 벼슬이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에 올라 흉노를 정벌한 공훈으로 요동백(遼東伯)에 봉 해졌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아니하고 환국하니 곧 공산군(公山君)에 봉 해지고 시호는 문무공(文武公)이시다.
그 아우 홍일도 대과에 급제하여 중서령(中書令)을 역임하고 귀국하여 전의군(全義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문목공(文穆公)이시다.
시조께서 공산군이므로 자손들이 본관을 공산(公山)으로 쓰며 공산지방에 세거하였다 고려 초기에 지명이 공주(公州)로 바뀌면서 관향을 공주로 쓰게 되었고 관향을 공주(公州) 또는 공산(公山)으로 쓰고 있으나 다 같은 일가이다.
신라 고려 조선조에 이르는 동안 군 후 상 시(君 侯 相 諡)가 많이 배출하니 정승(政丞)이 13분이고 군(君)을 봉 함이 21분이며 문자(文字)시호가 8분이요 충자(忠字)시호가 7분이며 후(侯)작위를 받음이 6분이니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삼한갑족의 대성이며 특히 31세 송령(松齡)은 이부상서 정양공(睛襄公)이고 그 아우 백령(柏齡)이 양산군 충민공(忠敏公)에 양산이씨(陽山李氏)로 분관되었고 34세 교송(喬松)은 문하평장사 공산부원군(公山府院君)이오 그 아우 자송(子松)이 첨의정승 수성부원군에 수원이씨(水原李氏)로 분관되었다.
고려 말엽에 36세 우(堣)는 전공시랑 금자광록대부 태자태부 양호공(楊胡公)이오 37세 저(苧)는 보문각대제학 화성부원군(花城府院君)이며 38세 사손(思孫)은 은자광록대부 첨의정승이오 39세 엽(曄)은 광록대부 전공판서 정충공(貞忠公)이며 그 아우 서(曙)는 판서 증 찬화공신으로 참지의정부사요 40세에서 자손이 크게 번창 하여 7파로 분파되었다
▸ 39세 엽(曄)의 여섯 아들 명선(明善)은 경력공(經歷公)파요 명성(明誠)은 문성공(文成公)파요 명덕(明德)이 공숙공(恭肅公)파요 명보(明保)는 지평공(持平公)파요 명윤(明尹)이 참의공(參議公)파요 명의(明義)는 현감공(縣監公)파요 서(曙)의 아들 부(敷)는 강양공(剛襄公)파로 7종형제가 분파되었다.
시조로부터 중세조이하 금세에 이르기까지 세계(世系)가 분명하고 뒷면 가문을 빛낸 주요인물과 같이 충절과 명신 도덕 문장과 효열의 대를 이어 왔으며 그 후손은 위대한 조상의 빛나는 얼을 이어 받아 명문가문의 무궁한 번영(繁榮)과 발전이 승승장구할 것이다.
연주 현씨(번호 135)
작품명 : 현玄 - 무궁無窮, 조각가
작품설명 : 연주현씨 휘장로고를 조형화한 작품으로 중심의 큰 ◯(원)은 한 뿌리 일근一根 즉 단일본과 우주의 중심을 뜻하며 3개의 작은◯(원)은 천지인天地人 삼원三元과 그 조화를 상징, 삼천리 강산 고을마다 자손만대 지혜와 기백으로 번창하고 조화를 이루어 무궁한 도약을 기약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유래 ▸ 시조(始祖)는 오늘의 평안북도 영변(寧邊)의 옛 이름인 연주(延州) 출신으로 고려(高麗) 의종(毅宗) 때 대장군(大將軍)으로 나라에 크게 공헌하신 문하시랑공(門下侍郞公) 현담윤(玄覃㣧)이시다.
용맹(勇猛)·지덕(智德)을 겸비하신 공(公)은 연주성(延州城)의 도령(都領)으로서 고려 명종(明宗) 때 조위총(趙位寵)의 난(亂)을 평정하심으로서 중신(重臣)인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오르시어 연산군(延山君)에 봉군(封君) 되셨다.고려사(高麗史)는 공(公)의 위대한 충절과 공훈에 대하여 “나라의 거성(巨星)으로서 기리 빛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시조의 세 아들도 국가에 큰 공을 세워 장남 덕수(德秀)는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으로, 차남 이후(利厚)는 광성군(廣城君), 삼남 덕유(德裕)는 회원군(檜原君)으로 봉(封)해지셨고, 그 자손들이 고려와 조선시대 및 근 현대를 거치면서 수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현씨는 우둔한 사람이 없다.”는 현무둔재(玄無鈍才)의 전통을 자랑으로 삼고 있다.
▸ 현씨(玄氏)는 연주(延州)를 단일 본관(本貫)으로 천년에 가까운 세계(世系)를 이어 오고 있다.
한편, 우리나라성씨 286성. 4,179본관(2000년 통계청 자료) 본관(本貫)이 있으며,[관향(貫鄕)] 시조(始祖), 중시조(中始祖)의 출신지와 혈족의 세거지(世居地)로 동족(同族)의 여부를 가리는데 중요하며, 씨족의 고향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성씨(姓氏)의 종류(種類)가 적어서 같은 혈족의 집안(가족)의 수가 많아지게 되어 성씨(姓氏)만으로는 동족(同族)을 구분하기가 곤란하므로 본관 (本貫)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자료 : 대전 뿌리공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