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시 중구 뿌리공원로 79에 위치한 ‘성씨(姓氏)별 뿌리공원’은 민과 관이 유기적인 협조체제로 조성된 전국 유일의 “효” 테마공원으로써 자신의 뿌리를 되찾을 수 있는 성시별 조형물과 사신도 및 12지지를 형성화한 부리 깊은 샘물, 각종행사를 할 수 있는 수변무대, 잔디광장과 공원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 팔각정자 뿐만 아니라 산림욕장, 자연관찰원 등 다양한 시설이 갖추어진 체험학습의 산 교육장이다.
광산 김씨(번호 16)
작품명, 조각가 : 박병희
작품설명 : 광산김씨의 화목하고 풍요로운 모습의 가족상과 훌륭한 가문을 두 손으로 받드는 형상으로 천대만대 조상을 섬기며 자손이 번창하는 아름다운 광산김씨 기상을 상징한 것이다.
유래 : 광산김씨는 신라 왕자인 흥광(興光)을 시조로 받든다. 왕자께서는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예지하시고 무주 서일동 지금의 담양 평장동에 터전을 잡고 살으셨기 때문에 광산(光山)으로 관향(貫鄕)을 삼게 되었다.
아드님 식(軾)이후 대대로 고려의 높은 벼슬인 평장사(平章事)로 오른 이가 여덟 분이나 되어 동네 이름을 평장동(平章洞)이라고 했다.
그 후손을 크게 문정공 태현(文正公 台鉉), 문숙공 주정(文肅公 周鼎), 양간공 연(良簡公 璉), 사온직장공 영(司?直長公 英)으로 나누고 있다. 조선에 들어와서 더욱 가문이 번창하고 많은 인물이 배출되어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일컬어졌다.
18세(世) 정(鼎)은 추성보리공신(推誠輔理功臣)으로 중대광대호군(重大匡大護軍) 광성군(光城君)에 오르셨는데 세 아드님이신 관찰사공 약채(觀察使公 若采), 척약재공 약항(?若齋公 若恒), 직제학공 약시(直提學公 若時)께서 다 과거에 오르셔서 크게 현달하셨고, 약채(若采) 선조께서 조선조 초기에 충청도관찰사를 지내면서 연산(連山)에 자리 잡게 되어 세칭 광김(光金)을 중심으로 한 기호유학(畿湖儒學)의 본거지가 되었다.
약채(若采)의 증손 국광(國光)께서는 적개공신(敵愾功臣) 좌리공신(佐理功臣)이라는 두 개의 공훈(功勳)에 책록(策祿)되고 숭록대부의정부좌의정(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으로 책봉(策封)되었으며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지었다.
국광(國光)의 5대손 사계 장생(沙溪 長生)선생께서 기호유학의 거대한 봉우리를 일으키셨다. 사계는 구봉 송익필(龜峰 宋翼弼),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적전제자(嫡傳弟子)로 성학(聖學), 성리학(性理學), 예학(禮學)에 두루 통달한 거유(巨儒)로 그 학통이 아드님 신독재 집(愼獨齋 集)에게 전해졌고 두 분의 문하(門下)에서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등 우리 역사를 빛낸 큰 학자가 줄을 이어 나와서 드디어 기호학파(畿湖學派)의 거대한 맥을 형성했다.
연산의 돈암서원에 기호학맥(畿湖學脈)의 자취가 남아있다. 광산김씨 가문이 영예로운 것은 우리 역사를 통틀어 으뜸가는 도학자(道學子) 열여덟 분이 오른 국학 성균관(成均館)의 문묘(文廟)에 두 분이 배향(配享) 되었고 특히 부자(父子)분인 사계와 신독재라는 사실과 조선시대 당대 최고의 석학만이 누릴 수 있는 대제학(大提學)을 일곱 분이나 배출한 사실이다.
또 사계선생의 삼자(三子) 허주 반(虛舟 槃)의 손자인 서포 김만중(西捕 金萬重)선생께서는 충효소설 구운몽(九雲夢)과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지어 우리문학사를 크게 빛내시었다. 그 밖에 정승판서 장군 충신열사는 이루 다 적을 수 없다.
그 대략은 뒷면과 같다.
경주 석씨(번호 57)
작품명 : 영원의 시간, 조각가 : 석 현
작품설명 ■ 작품의 상부와 하부로 나눠진 것은 땅과 하늘을 상징하고 ■ 상부 8개 기둥은 석씨 8왕, 밖을 향해 벌어진 것은 자손의 번성, 번영이 세상을 향해 뻗기를 원하며, 상단에 신라왕의 상징인 금관을 얹었음 ■ 측면 문양은 ●탈해가 탄생하실 때 하늘에서 비친 서광과 수많은 까치들 사이에서 배를 타고 온 아기가 상자에서 발견된 설화 ● 남해왕께서 성명을 지어 주실 때 말씀하신 까치 작(鵲)자에서 새 조(鳥)자를 날려 보내고 남은 글 석(昔)을 성으로, 알에서 깨어나고 궤를 열고 나왔다하여 탈해(脫解)라고 이름 붙인 설화를 표현함.
유래 ▸ 삼국사기에 의하면 기원전 5년(박혁거세 52년)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 아진포 포구에서 석씨의 시조인 석탈해 왕이 탄생했다.
이를 기리기 위해 탄생지에는 지방기념물 제79호로 지정된 탄강유허비각이 있다.
▸ 석씨의 창씨와 왕의 등극 : 탈해는 어려서부터 말과 글 그리고 지혜와 풍채가 뛰어나 남해 왕께서 소년을 입궐케 하여 대면하던 중 성과 이름이 없음을 알고 “소년이 처음 태어날 때 까치들이 우짓다가 그 새들이 모두 날아가고 아기만 남았으니 까치 작(鵲)자에서 새 조(鳥)자를 없애고 옛 석(昔)자만 남겨 성으로 하고, 궤를 열고 알에서 깨어났으니 이름을 탈해(脫解)로 하라”고 하면서 친히 성명을 지어 주셨다.
그는 대보(국무총리)의 관직을 거쳐 서기 57년에 신라 제4대 왕으로 등극하셨다.
▸ 신라 석씨 8왕 : 재위 통산 173년
▸ 제4대 석탈해 왕. 제9대 석벌휴 왕
▸ 제10대 석내해 왕. 제11대 석조분 왕
▸ 제12대 석첨해 왕. 제14대 석유례 왕
▸ 제15대 석기림 왕. 제16대 석흘해 왕
▸ 왕릉과 숭신전, 탈해 왕이 서기 80년에 돌아가시자 궁궐 북쪽 양정 언덕(경주시 동천동 350번지)에 왕릉을 모셨는데 사적 제174호로 지정되어 있고, 동편에는 광무5년(서기 1898년)에 숭신전(崇信殿)을 건립하여 시조왕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를 올리니 경상북도 문화재 제256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우리나라성씨 286성. 4,179본관(2000년 통계청 자료) 본관(本貫)이 있으며,[관향(貫鄕)] 시조(始祖), 중시조(中始祖)의 출신지와 혈족의 세거지(世居地)로 동족(同族)의 여부를 가리는데 중요하며, 씨족의 고향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성씨(姓氏)의 종류(種類)가 적어서 같은 혈족의 집안(가족)의 수가 많아지게 되어 성씨(姓氏)만으로는 동족(同族)을 구분하기가 곤란하므로 본관 (本貫)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자료 : 대전 뿌리공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