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시 중구 뿌리공원로 79에 위치한 ‘성씨(姓氏)별 뿌리공원’은 민과 관이 유기적인 협조체제로 조성된 전국 유일의 “효” 테마공원으로써 자신의 뿌리를 되찾을 수 있는 성시별 조형물과 사신도 및 12지지를 형성화한 부리 깊은 샘물, 각종행사를 할 수 있는 수변무대, 잔디광장과 공원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 팔각정자 뿐만 아니라 산림욕장, 자연관찰원 등 다양한 시설이 갖추어진 체험학습의 산 교육장이다.
작품명 : 화합과 번영, 조각가 : 김지삼
작품설명 : 고고呱呱한 신라新羅 千年의 여명黎明을 열어, 하늘을 찌를 뜻한 용맹勇猛과 기상氣像으로 웅비雄飛의 새 역사를 창조하고, 새 시대時代 광명光明의 세대世代에 만백성과 더불어 이 땅에 화평和平과 안락安樂을 이루어 자손만대 번영繁榮과 복락福樂을 누리기를 기원祈願하는 의미를 담음
유래 ▸ 경주김씨 시조(始祖)는 신라 대보(大輔)의 벼슬을 지내신 알지(閼智) 공(公)시다. 공(公)은 서기 65년 봄 3월 밤에 지금의 경주시 교동소재의 계림에서 탄강하셨다.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에 의하면, 왕이 금성(金城) 서쪽에서 닭우는 소리를 듣고, 새벽에 신하를 보내 알아보게 하니 숲속에서 찬란한 빛이 밝게 빛나고 자주(紫朱)빛 구름이 하늘에서 땅까지 드리워지고 구름 속으로 보이는 나뭇가지에는 황금 상자가 걸려 있는데 그 상자 속에서 빛이 나오고 나무 밑에서는 흰 닭이 울고 있었다.
왕이 숲으로 가 그 상자를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누워 있다가 곧장 일어났는데 그 아이의 자태와 용모가 범상치 아니하므로 왕이 “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내린 아들이 아니겠는가” 라고 기뻐하며 어가(御駕)에 태워 대궐로 돌아오는데 새와 짐승들이 서로 기뻐 춤을 추며 뒤를 따랐다.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니 그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성은 금궤에서 나왔다고 하여 김(金)이라 하였다,
그 후 태자로 책봉하여 왕위에 오르시게 하였으나 극구 사양하시고, 재상(宰相)인 대보(大輔)의 벼슬을 제수(除授)받아 대보공(大輔公)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공의 7세손인 김미추(金味鄒)가 경주김씨로는 첫 왕위에 오르시니 이분이 곧 신라 제13대 미추왕이시다.
신라 992년간 56왕 중 경주김씨 38왕이 왕위에 올라 신라 천년의 치세(治世)를 누렸다. 우리 경주김씨 38왕이 신라를 다스리는 동안 화백회의를 통하여 고대사에 유례가 없는 민주정치를 구현하고 화랑도와 세속오계를 창도(唱導)하여 나라를 이끌 인재의 양성과 백성의 나아갈 바를 가르쳐 3국 통일의 대업을 이루고 불국사, 석굴암, 첨성대와 같은 불후의 민족문화의 정수(精髓)인 신라 문화와 예술을 꽃 피워냈다.
우리 경주김씨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을 중시조로 하여 본관을 경주로 득관(得貫)하여 선조의 숭고한 애족애민 사상과 찬란한 신라문화 창달의 예지(睿智)를 이어 받아 국내 유수의 명문거족으로 크게 번성해 왔다.
이 글을 읽는 우리 경주김문 후손들이여! 자랑스러운 신라왕손의 후예임을 잊지 말고, 빛나는 선조의 얼을 오늘의 되살려 원대한 꿈을 품고 진취적인 기상과 불같은 열정으로 오늘을 살라!!
신라기원 2065년(서기2008년 10월)
경주김씨중앙종친회
청송 심씨(번호 69)
작품명 : 청송 심씨의 얼, 조각가 : 길홍랑
작품설명 : 중앙에 우뚝 솟아 있는 탑신은 청송심문의 기상을 표현한 것으로 주왕산에는 우리 문중의 영기가 서려 있고 소나무는 사시사철 푸르러 자손만대의 무궁한 발전과 번영을 상징하고 있다 가장은 우리의 후손들이 전세계를 향하여 힘차게 발전하고 있음을 나타냈으며 문중의 사적을 기술하여 자신의 뿌리를 알고 숭조돈목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유래 ▸ 경상북도 청송(靑松)을 관향(貫鄕)으로 삼은 청송심씨(靑松沈氏)는 고려조 고종(高宗) 원종(元宗)년간에 출생하신 문림랑공(文林郞公) 홍부(洪孚)를 시조(始祖)로 삼고 오랜 세월동안 위로는 조상(祖上)을 섬기고 아래로는 자손(子孫)을 보살피면서 국가추요(國家樞要)의 문중으로 현달(顯達)하였다.
문림랑공은 벼슬이 위위시승(衛尉侍丞)에 이르고 두 아드님을 두시니 長은 연(淵)으로 합문지후(閤門祗侯)이고 次는 성(晟)으로 봉익대부(奉翊大夫)이다.
지후공이 아드님을 두시니 용(龍)으로 청화부원군(靑華府院君)에 추증(追贈) 되었으며 2남을 두니 덕부(德符)와 원부(元符) 두 형제분께서 벌열(閥閱)의 문을 열으시었다. 봉익공은 2남을 두니 長이 판서공 연(漣)이고 次는 상호군공 경(卿)으로 그의 예손(裔孫)은 북한지역 고도에서 대대로 번연(蕃衍)하니 세거지가 되었다.
정안공(定安公) 덕부(德符)는 문무를 겸비하여 고려조에서 대명외교와 왜구토벌에 공을 세워 청성부원군(靑城府院君)에 봉군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으며 조선조에 들어와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지고 정종조(定宗朝)에는 좌정승에 올라 경륜을 폈다.
공이 7남을 두니 1남은 인봉(仁鳳)으로 도총제요 2남은 의구(義龜)로 판사이고 3남은 계년(繼年)으로 지성주사이다.
4남은 징(澄)으로 인수부윤이고 5남은 온(溫)으로 영의정이며 세종국구로 시호(諡號)가 안효(安孝)이다 6남은 종(淙)으로 태조대왕의 2녀 경선공주를 맞아 부마도위 청원군이요 7남은 정(정)으로 동지총제이다.
악은공(岳隱公) 원부(元符)는 전리판서(典理判書)의 지위에 올랐으나 고려조가 종언을 고하자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절의를 지켰으며 세분의 아드님을 두니 1남은 천윤(天潤)으로 영동정이요 2남은 천주(天柱)로 현령이며 3남은 천식(天湜)이다.
그 외 자손들도 모두가 동량지재(棟樑之材)였고 계계승승(繼繼承承) 잠영세족(簪纓世族)이 되어 국가를 이끌었다.
청성백의 5남 온(溫)의 따님이 세종대왕비 소헌왕후(昭憲王后)로 한때 부왕이신 태종(太宗)의 외척배격정책으로 멸문지경에 이르렀으나 왕후의 영민함과 공덕에 힘입어 위기에서 비켜날 수 있었으며 이후로 청송심씨는 동국 10대 벌족으로 번영하여 왔다.
인구수는 우리나라 256성씨 중 38위지만 명현달사(名賢達士)를 수없이 배출하여 정계추요(政界樞要)의 각신(閣臣)으로 혹은 노사숙유(老士宿儒)로 청사에 그 이름을 남겼다.
13정승 2문형 3왕후 4부마에 정승(政丞) 중에도 영의정이 9명으로 각 문중 중에서 으뜸이며 내리 3대정승과 형제가 정승을 지내기도 했다.
대과급제가 196명이고 무과급제는 350여명 공신책록이 400여명이니 더 할 수 없는 영예이다.
역경(易經)에 착한 일을 쌓은 가문에는 반드시 경사스러움이 있다했거니와 오늘 이 시대를 사는 후손들도 각계에서 중추적인 역할로 국가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한편, 우리나라성씨 286성. 4,179본관(2000년 통계청 자료) 본관(本貫)이 있으며,[관향(貫鄕)] 시조(始祖), 중시조(中始祖)의 출신지와 혈족의 세거지(世居地)로 동족(同族)의 여부를 가리는데 중요하며, 씨족의 고향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성씨(姓氏)의 종류(種類)가 적어서 같은 혈족의 집안(가족)의 수가 많아지게 되어 성씨(姓氏)만으로는 동족(同族)을 구분하기가 곤란하므로 본관 (本貫)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자료 : 대전 뿌리공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