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시 중구 뿌리공원로 79에 위치한 ‘성씨(姓氏)별 뿌리공원’은 민과 관이 유기적인 협조체제로 조성된 전국 유일의 “효” 테마공원으로써 자신의 뿌리를 되찾을 수 있는 성시별 조형물과 사신도 및 12지지를 형성화한 부리 깊은 샘물, 각종행사를 할 수 있는 수변무대, 잔디광장과 공원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 팔각정자 뿐만 아니라 산림욕장, 자연관찰원 등 다양한 시설이 갖추어진 체험학습의 산 교육장이다.
진주 류씨(번호 36)
작품명 : 버드나무, 조각가 : 문윤형
작품설명 : 한국 민화의 형식은 모자란 듯 넘쳐나는 여유로움과 정감을 준다. 단순함과 투박한 형태적인 요소를 강조하여 표현 하였고 고 미술에서 발견되는 단위면적당 정의 개수를 달리하여 질감과 색의 변화를 의도 한다.
作帝建賚七寶將還 龍女曰 父有楊丈與豚勝 七寶 盍請之[고려사 세계 권제5뒤쪽] 용녀 왈 “아버지에게 버드나무 지팡이와 돼지가 있는데 그것은 칠보보다 더 귀중한 것이니 그것을 청하십시오.” 하였다.
고려태조의 탄생신화에 근거한 버드나무 지팡이의 버드나무를 성으로 하사한 것은 건국의 공신으로서 왕건의 애정이 각별하였다고 볼 수 있다.
진주 류씨의 근원이 고려 건국설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어 버드나무를 소재로 선택하여 진주 류씨의 상징물을 만들었다.
유래 ▸ 류씨 성(姓)의 기록이 처음 보이기 시작한 것은 후삼국 시대 말 고려 개국전후이다.
시조는 고려 개국 삼한공신(三韓功臣) 대승공 류차달 (大丞公 柳車達)이다 七世 문간공 공권 (文簡公 公權) 八世 상서공 언침 (尙書公 彦琛) 九世 밀직사 순 (密直使 淳)으로 이어졌으며 十世에 판시사 진산군 인비 (晋山君 仁庇)께서 이봉 득관 (得貫)하여 진주류씨의 中始租가 되셨다.
손자 익양공 혜방 (翊襄公 惠芳)과 안간공 혜손 (安簡公 蕙孫) 이후에 자손이 크게 현달하고 번창하여 이판공파 (吏判公派) 북부령공파 (北部令公派) 시윤공파 (寺尹公派) 안간공파 (安簡公派)로 대별되며 충효전가 청백유업을 계속 이어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제학 (大提學)2인 淸白吏4인 相臣2인 공신녹권이 8인 증시 贈諡 17인 등단장신 (登壇將臣) 4인 병마절도사 30인 삼도수군통제사 10인 수군절도사 27인 牧使府使 86인 문과급제 80인 무과급제 380인이며 육조판서와 삼사(三司)의 대간 (臺諫) 承旨 지방 목민관 原從功臣 등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국난이 있을 때 마다 진충보국 (盡忠報國)의 공신 충신열사가 나왔으며 윤리기강 紀綱이 해이 할 때 마다 효자 열녀가 이어져 내려와 정려 (旌閭)를 받은분 또한 많으며 문장서화 (文章書畵)에 진동 (辰仝) 혁연 (赫然)이 있으며 三大墨竹晝家에 오른 덕장 (德章)과 文通集 언문지 (諺文誌)를 남긴 희 (僖) 등이 드러난 분이다 유림으로부터 도덕군자로 추앙받는 학자로서 경국제세 (經國濟世)를 논하고 학문에 전념한 은일 (隱逸)과 명현 또한 많으니 文講 武習하여 잠영진신 (簪瓔縉紳) 무반벌족이 끊이지 않아 오늘날에도 입법 사법 행정부와 경제계 문화계 언론계등 각 분야에서 中樞역할을 하고 있는 기라성 같은 후손이 많다.
追遠報本에 뜻을 두어 선대유업 (遺業)의 현양(顯揚) 사업과 활기찬 미래 창조의 後學 인재 육성에 뜻을 가지고 진산 晉山 장학회를 결성하여 1년에 200명의 대학생에 장학금을 수여하며 국가와 사회에 이바지 할 수 있는 동량 (棟樑)을 키우고 있다.
종원이 적은 인구수에 비해 우뚝하고 빼어난 굴지의 벌렬화족 (閥閱華族) 가문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으니 아! 훌륭하도다.
名家의 후예로서 빛나는 전통을 이어받은 자긍심을 가지고 멸사봉공 殺身成仁의 정신으로 국가와 사회에 헌신 봉사하면서 인화단결 숭조목종 (崇祖睦宗)의 崇高한 뜻을 이 빗돌에 새겨 한밭의 명승지 뿌리 공원에 세워 후손과 함께 천추만세에 영원히 남겨질 것이다.
순흥 안씨(번호 70)
작품명, 조각가 : 安容植
작품설명 : 책모양의 작품은 학문을 숭상한 선조의 예로서 우리 모두 책을 가까이하여 마음의 양식을 쌓고 진리가 있음을 깨달으며 선현의 뜻을 되새기고 학문을 넓혀 나아가 미래를 창조하는 원동력과 인류사회에 널리 공헌하자는 뜻을 담았다.
상징은 한자의 안安자를 형상화한 것이다 뜻은 천지인天地人을 바탕으로 하여 위의 원은 우주를 향하여 뻗어가는 우리의 미래상을 제시하였고 가운데 타원형은 오십만 종친이 한울타리에서 결속숭조목족하자는 뜻이며 아래 일一은 생명의 모태인 땅을 상징하고 있다.
유래 ▸ 순흥안씨(順興安氏)는 지금의 경북 영주 순흥을 관향으로 하는 성씨로 시조 공 안자미(安子美) 선조는 고려 신종(神宗) 때인 1200년 경 순흥에 거주하였으며 상호군으로 추봉되었다.
아들 삼형제를 두었으니 장남은 부사공 안영유(安永儒) 차남은 별장공 안영린(安永麟) 삼남은 교서랑공 안영화(安永和)이다.
이 세 분의 후손이 22개파로 분파되었고 그후에 많은 학자와 시호(諡號)를 받은 분이 33현(賢) 봉군(封君) 21현(賢) 문과급제(文科及第) 188명을 배출하였다 시조공의 증손인 문성공(文成公) 회헌(晦軒) 안향(安珦)은 벽상삼한삼중대광 도첨의중찬 수문전태학사(壁上三韓三重大匡 都僉議中贊 修文殿太學士)로서 우리나라에 최초로 주자학을 도입하고 장학재단인 섬학전(贍學錢)을 설립하여 고려 말 유학 진흥에 큰 공적을 세워. 이에 국왕은 문성공의 시호를 내려 문묘(文廟)에 배향하게 하고 영정을 그려 순흥향교에 모시게 하였고. 현재는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소수서원에 소장되어 있다.
문의공(文懿公) 질재(質齋) 안문개(安文凱)는 삼중대광 좌정승 지공거(三重大匡 左政丞 知貢擧)를 역임하며 충숙왕과 원나라에서 억류생활까지 하면서 고려의 국난극복에 힘썼다.
증손 안준(安俊)은 고려 말 충신이며 안홍국(安弘國) 안위(安衛)는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명장이다.
문정공(文貞公) 근재(謹齋) 안축(安軸)은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역임하며 경기체가인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죽계별곡(竹溪別曲)을 지어 국문학사에 크게 이름을 떨쳤다.
아들 문간공(文簡公) 안종원(安宗源)은 조선조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이며 손자 안경공(安景恭)은 조선 개국에 참여 개국원훈공신(開國元勳功臣)이 되었으며 증손 안순(安純)은 세종때 호조판서(戶曹判書)를 12년 역임하며 난시제민(難時濟民)의 큰 공을 세웠다.
순흥 읍내리에 안석(安碩)·안축(安軸)·안보(安輔)·안집(安輯) 사부자가 쓰던 우물이 사현정(四賢井)으로 남아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관향 순흥에서는 금성대군의 단종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죽계천이 피로 물들게 한 참혹한 화를 입었고 한양에서는 여러 사화로 인하여 많은 분들이 화를 입거나 전국 각지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
그 중에서 안천보(安天保) 안지귀(安知歸) 안침(安琛) 안지(安止) 안당(安瑭) 안위(安瑋) 안현(安玹) 안명세(安命世) 안방준(安邦俊)등은 올곧은 선비이며 명재상으로 저명하였으며 특히 근세에 이르러 이등박문을 저격한 안중근(安重根)의사를 비롯하여 민족의 스승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선생 안재홍(安在鴻) 안익태(安益泰) 안희제(安熙濟) 안무(安武) 안창남(安昌男)은 나라가 암울하던 시절에 한민족의 정신과 기개를 세상에 드날렸다.
순흥안씨는 현제 전국에 약 50여만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 산413-1에 조성한 순흥안씨추원단(順興安氏追遠壇)에 시조공과 11위의 조상의 제단을 모시고 매년 음력 10월1일 전국에서 2천 여명의 후손들이 모여 세사(歲祀)를 봉행하며 후손 모임으로는 순흥안씨 대종회와 각파 종친회 그리고 전국 시도에 종회가 있다.
한편, 우리나라성씨 286성. 4,179본관(2000년 통계청 자료) 본관(本貫)이 있으며,[관향(貫鄕)] 시조(始祖), 중시조(中始祖)의 출신지와 혈족의 세거지(世居地)로 동족(同族)의 여부를 가리는데 중요하며, 씨족의 고향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성씨(姓氏)의 종류(種類)가 적어서 같은 혈족의 집안(가족)의 수가 많아지게 되어 성씨(姓氏)만으로는 동족(同族)을 구분하기가 곤란하므로 본관 (本貫)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자료 : 대전 뿌리공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