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여사 추사비(春女思秋士悲) - 봄은 여인을 사랑하게 만들고, 가을은 남자를 슬프게 만든다.'

봄에 여인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생각에 가슴이 들뜨지만, 가을에 남자들은 한해 동안의 자기를 뒤돌아보며 비감에 젖는다는 뜻이다.

한잎 한잎 떨어지는 낙엽과 함께 또 하루 하루 한해가 속절없이 떠난다.

곧 서리가 내리면서 만물이 얼어붙는 겨울이 느닷없이 닥치리라.

정신없이 보냈던 올 한해,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보내는 이 가을, 뜻이 큰 남자들이 깊은 시름에 젖게 되는 계절이다.

무엇을 이루고자 했던가.

비탈길을 굴러 내려가는 삶의 수레바퀴에 얹혀져 탈선되지 않기만을 바라며 기를 쓰고 바퀴살에 매달려 정신없이 세월을 보냈다. 아직도 바퀴는 멈추지 않고 오히려 점점 가속도를 낸다. 나 또한 더욱더 악을 쓰고 온힘을 다해 바퀴에 매달려 있을 수 밖에.

무엇이 좋고 무엇이 옳은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았다.

동물에는 세가지 종류의 뇌가 있다고 한다.

파충류의 뇌, 포유류의 뇌, 인간의 뇌.

파충류는 감정소통이 어렵다. 뱀이나 악어의 눈을 아무리 응시해보라. 그들에게서는 애증의 감정의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먹이가 먹고 싶으면 먹고 없으면 탐할 뿐, 주인을 알아보는 사랑이나, 본능이외의 희생이라는 뇌작용이 없다. 파충류는 철저하게 좋은 것만을 추구하는 동물이다. 좋으면 취하고 싫으면 피하거나 물어뜯을 뿐이다.

포유류의 눈에서는 감정의 기복이 읽혀진다. 개의 눈을 보라. 사람과 거의 다름없는 감정과 희노애락의 표현이 살아있다. 포유류가 추구하는 것은 먹이와 사랑이다. 그들에게는 감정은 있으나 이성이 없다.

파충류나 포유류의 동물의 뇌는 이처럼 단순하다. 그들은 좋아하는 것만을 좋아하고, 그것에 목숨을 건다.

그러나 사람의 뇌는 보다 복잡하다. 좋은 것을 추구하면서도 그것이 옳은 것인가를 생각한다. 이성이 있는 것이다.

'견리사의(見利思義)-이익을 보면 그것이 옳은 것인가를 생각하라.'

'경우바른 사람'이라는 것은 옳고 그른 것을 잘 가리는 사람을 말하는 말이리라. 이 사회에서 존경받는 사람의 모습이다. 

이것이 인간의 뇌이다. 다른 어떤 동물에게도 없는 인간만의 뇌의 작용이다.

따라서 인간과 동물의 구분은 옳은 것을 아는가 모르는가의 기준에 달려있다.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이라 손가락질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자기 좋은 것만을 취할 뿐, 옳고 그른 것은 생각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하물며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면 남이야 죽든 말든 자기 이익만을 챙기는 사람을 말한다. 인간이라는 이름에 값을 하려면, 아무리 굶을지언정 옳지 않은 음식을 취하지 않는 것이요, 아무리 싫어도 옳은 일이라면 불이익, 심지어는 목숨까지 걸고 감행하는 것이다.

금년, 나는 그래도 옳고 그른 것을 생각하며 한해를 살았던가.

옳은 것을 위해 불이익이라는 것을 감수해 본 적이 있었던가. 그저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나 좋은 것만을 쫓아가며 살지는 않았는가.

돈과 풍요만이 최고라는 생각에 정신없이 살았지만, 그나마도 이루어내지도 못한 삶을 살지는 않았는가.

내 목표를 위해 정의도, 법도, 상식도 적당히 피하고 속여가며 목표를 달성하는 것만이 성공하는 생이라고 여기며 살지는 않았는가.

국민의 혈세든 뭐든 볼 것 없이 내 목표를 위해 마구 퍼 쓰지는 않았는가. 그저 받으면 좋아서 무슨 돈인지, 무슨 선물인지 가릴 것 없이 못받으면 바보라는 식으로 손을 내밀며 살지는 않았는가.

나는 인간의 뇌를 쓰지 않고 짐승의 뇌를 쓰고 살지는 않았는가.

나는 과연 인간답게 살았던가.

새벽에 일어나 찬 서리를 맞으며 또 우수수 떨어지는 하루를 보며 처연해진다. 갑자기 나는 짐승같이 또 한해를 살았다는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가을의 남자는 슬픔에 빠지게 된다. 인간이라면...  

 글쓴이  최 민 호